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니체 (문단 편집) === 데카당스 === 니체의 미학에 관한 부분이다. 우선 니체의 문제의식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19세기 유럽은 [[허무주의]] 사상이 유행했고, 프랑스 작가들([[빅토르 위고]])을 중심으로 낭만주의와 순수예술을 활발하게 탐구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는 기성세대 유럽인에게 당혹스러운 것이었는데, 허무주의는 기독교나 권위를 무의미하다고 조롱하여 사회의 해체를 이끄는 한편, 예술은 [[아방가르드|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변해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감한 변화는 부정적인 뜻으로 각각 [[니힐리즘]]과 [[데카당스]]라고 불렸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었는데, 허무주의로 인해서 계급갈등, 남녀차별과 같은 문제가 광범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현대예술의 개념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비로소 유럽이 [[현대]]의 초입에 서게 된 것이다. 다만 이런 긍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허무주의는 한계에 봉착했다. 온갖 가치를 파괴했지만 정작 새로운 가치는 제시하지 못한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아노미|가치의 진공상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는 2020년대 한국이 유교적 가치가 '''뇌사 직전'''이지만, 이를 대체할 가치가 없는 붕뜬 상태인 것과 유사하다. 다만 현대의 한국은 어설프게라도 따라할 유럽식 가치라도 있지만, 19세기 유럽은 그런것조차 없었다는 점에서 훨씬 절망적이었다. 니체는 이러한 '유럽의 병'을 진단한 결과, 예술과 철학의 균형이 깨진 것을 병인으로 봤다. 니체에게 예술과 철학은 그 경계가 흐릿하다. 철학이란 내가 총체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는 '보편성' 또는 '일반화'라고도 불리는 추상화를 수반한다. 예를 들어 벚나무, 버드나무, 소나무, 야자수를 우리는 뭉뚱그려 나무라고 일반화해서 부른다. 일반화라는 것은 나무의 보편성(가령 잎, 줄기, 가지 같은 특징 등등)을 추려내는 작업이며 그와 동시에 각 나무의 개성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나무라는 일반명사에는 벚나무의 화사한 꽃도, 버드나무의 늘어짐도, 소나무의 향도, 야자수의 곧은 줄기도 담겨있지 않다. 이러한 추상화 작업을 통해 세상을 [[모델링]]한 것이 철학이다. 그런데 이 모델링이란 것은 니체가 보기에 그 본질이 '[[비유]]'이다. 물리학자 [[러더퍼드]]는 천체와 원자의 궤도가 일치한다고 보았고 러더퍼드 모형을 만들었다. 양자역학에 의해 러더퍼드 모형은 실제 원자의 움직임과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으나, 그 유용성을 인정받아 아직도 널리 쓰이고 있다. 러더퍼드의 개성과 독창성이 담긴 비유인 것이다. 그 점에서 니체는 철학과 과학의 모델링 작업은 비유적이고, 은유적이고, 예술적이라고 한다. 예술도 그 본질이 비유이고 은유라고 니체는 보았다. 내가 체험한 것, 심리적 현실을 외부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다.(음악은 예외다.) 극사실화조차 내가 감각한 표상을 본뜬 것, 즉 비유다. 사진도 나의 표상을 구도와 빛으로 흉내낸 것, 즉 비유다. 니체에게 예술과 철학의 차이점은 어떤 방식으로 비유와 은유를 사용하느냐이다. 철학과 과학은 위에서와 같이 '[[일반화]]'를 통해서 내가 감각했던 것을 추려낸다. 철학이 100 종의 나무를 단 하나의 '나무'라는 개념으로 만들고, 그와 정반대로 예술은 더한다. '[[과장]]'이다. 예술은 단 한 그루의 나무에 집중해서 100가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그 한 그루의 나무가 세상의 모든 것 이라는 듯이 내 몸속에 떠오르는 느낌, 감정을 폭발하듯 표현한다. 충동적인 것이고, 과장인 것이다. 니체의 시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철학 vs 예술 = >일반화 vs 과장 니체는 고대 그리스에서 두 신이 유난히 숭상되는 것에 주목했는데, 질서의 [[아폴론]]과 충동의 [[디오니소스]]가 그것이다. 평상시에는 아폴론이 숭배되지만, 일 년에 한 번씩 사람들이 미친듯이 [[디오니소스 축제]]를 하는 것을 니체는 '질서와 충동이 본래 사람에게 내재한다'고 해석한다. 그가 보기에 질서와 충동의 정서가 잘 조화된 것이 [[그리스 비극]]이다. 아테네에는 디오니소스 축제 주간에 연극 발표대회를 진행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때 출품한 작가 중에 우수한 작가 3명을 뽑아서 축제기간에 상연한다. 각 작가는 4편의 연극을 한 세트로 제출해야 했다. 그러니까 도합 12편의 연극이 상영된 것이다.상연하는 각 작가의 연극 비율이 비극 3편 : 희극 1편이었다. 아테네의 축제기간 동안 연극은 도시 [[아고라]] 옆의 대형 극장에서 상연되는 반면에 디오니소스 축제는 도시 성벽 밖의 언덕에서 이루어졌다. 축제하러 갈 사람들[* 광란의 축제에 뛰어든 사람들은 노예나 여성 등 피지배층이 주류였다. 평소에 억압받던 사람들이 한번 푸는 날이었기 때문이다.]은 도시 밖으로 다 빠지고 비교적 점잖은 지배층들이 모여서 비극을 봤다. 아테네의 지배층들은 왜 굳이 [[비극]]을 봤을까? 이에 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 즉 평상시 이성으로 억눌렀던 감정을 씻어내는 것으로 봤고, [[쇼펜하우어]]는 내 몸의 생존 의지가 덧없음을 깨닫게해서 진정한 자유, 일종의 [[열반]]으로 향하는데 사용했다고 봤다. 둘 다 일종의 반면교사의 용도로 여긴 것이다. 반면 니체는 [[그리스 비극]]도 이성적인 사람들이 즐기는 일종의 [[디오니소스 축제]]였다는 생각을 한다. 그 본질이 '충동'과 '도취'로서 같다는 것이다. 평상시 그리스인이 섬기는 질서의 [[아폴론]]은 이성의 신앙이다. 이성은 인간이 당장 살아가는 데 유용하다. 지도를 아는 사냥꾼이 사냥감을 잘 잡듯이 철학, 과학으로 세상을 잘 모델링하면 살아가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이성]]이 하는 세계의 [[모델링]]은 모두 불완전하다. 감각경험(데이터)를 모아서 어림짐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기존 이론으로 설명이 안되는 예외적인 사실들이 있는 것도 모두 불완전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성을 아무리 활용해도 우리의 삶에는 도무지 예상도 통제도 안되는 불운과 불행이 우리를 좌절하게 만든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이것을 "원리에로 환원시킬 수 없고 굽힐 수도 없는 엄연한 사실"이라고 불렀다.] 게다가 이성적인 삶만 추구해서는 [[허무주의]]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은 결국 죽기 때문이다. 단순히 생존하기 위해서 산다는 것은 결국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무의미하다. 이성의 눈으로 보면 나의 멸망은 확고하게 예정되어 있다. 모를 수가 없다. 여기서 [[디오니소스 축제]]가 의미를 가진다. 이성과 달리 충동은 먼 미래를 내다보지 않으며, 당장 눈앞의 것만 쫒아간다. 거기에는 그 다음이 없으며 오직 지금 '도취'하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포도주의 취기, 흥에 겨워 추는 춤, 생판 처음 보는 남녀와 나누는 육체적 쾌락 등 디오니소스 축제는 지금의 느낌만이 존재한다. 니체가 보기엔 [[그리스 비극]]도 이와 같다. 비극은 인간이 마주하는 고통을 '과장'하여 표현한다. 그래서 비극에 빠져들어 회로애락에 통탄하면서도 상연이 끝나면 후련한 기분으로 극장을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느끼는 감정을 좋은것으로 여긴다. 니체의 다소 [[마조히즘]]스러운 측면인데, >[[Stronger (What Doesn't Kill You)|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로 흔히 알려진 그의 인생관이다. 니체는 사람의 삶을 [[헤라클레스]]와 같은 그리스 영웅신화의 관점에서 본다. 터무니없는 고난으로 고통을 느낄 때 역설적으로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더욱 강해진다. 즉, 강한 고통은 내가 살아있다는 강력한 증거인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나는 여기 살아있다. 그리고 더 살고 싶다." 이 깨달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고난을 헤쳐나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극이란 예술은 이것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해준다. 이렇게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생의 의지를 부질없는 것으로 여긴 것과 정반대의 태도를 보인다. >"비극적 예술가는 자신의 무엇을 전달하는 것인가? " >그가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끔찍한 것'''과 '''의문스러운 것'''[* 인간의 삶은 '우연'과 '불합리'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끔찍하고도 의문스러운 것이다.] 앞에서의 공포 없는 상태가 아닌가? 그 상태 자체가 지극히 소망할 만한 것이다. 이런 상태를 알고 있는 자는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그가 예술가라면 그는 그 상태를 전달하며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강력한 적수 앞에서, 커다란 재난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문자 앞에서 느끼는 용기와 자유ㅡ 이런 승리의 상태가 바로 비극적 예술가가 선택하는 상태이며, 그가 찬미하는 상태이다. >『우상의 황혼』 도취(디오니소스)는 삶을 풍부하게 하는 소중한 것이지만, 니체는 분명 꿈, 형상(아폴론)도 소중히 여긴다.그 점에서 [[데카당스]]가 문제되는 것이다. 데카당스는 니체가 보기에 >질서 vs 충동 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이다. 충동의 극단으로 치닫아버린 것이다. 충동이 현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대신에 공상으로 도피하는 수준으로 치닫은 것이다. 그리고 아폴론(질서의 정서)의 극단인 인형같은 삶과 달리, 디오니소스(도취의 정서)의 극단은 짐승보다 못한 삶이다. 극단적인 삶은 절제가 결여되고, 마약에 중독된 것과 같은 자멸적인 삶이다. 결국 니체가 제안하는 질서와 충동의 정서의 조화라는 것은, 일주일에 일요일은 쉬고, 그리스 비극도 영화도 적절히 보는 것이지, 한달 내내 방구석에서 보는 것은 365일 [[디오니소스 축제]]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고, 니체가 보기에는 데카당스이다. 무엇이 이런 [[데카당스]]에 빠지게 했는지에 관해서 니체는 질서의 정서 과잉이 원인이 되었다는 시각을 제시한다. 그가 볼 때 고대 그리스에서 [[그리스 비극]]의 몰락을 가져온 것은 [[소크라테스]]의 등장이다. 소크라테스가 [[이성]] 지상주의를 이끌면서 질서 과잉 상태로 나간 반면에, 충동의 정서는 철저하게 무시당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질서의 정서와 철학에게 버림받은 고대 그리스의 예술 또한 충동 과잉으로 치닫으면서 탐미주의에 빠져 자멸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두 정서의 [[양극화]]가 발생한 것이다. 니체는 이 기조가 중세 기독교를 거치면서 강화되어 19세기 독일에 이르렀다고 여긴다. 결국 니체가 제시하는 것은 질서와 충동의 정서가 다시 건전한 조화를 이루는 예술과 소비방식이 부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결국 철학이 먼저 변해야한다. [[데카당스]]는 철학이 충동의 정서와 예술을 무시하고 버린 결과이기 때문이다. 철학이 독단적인 객관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하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